발 딛고 선 지면이 허상이라고 의심해 본다. 사회의 규범과 약속으로 만들어진 콘크리트 블록, 그 밑에 닿을 수 없는 진짜 바닥이 숨어 있다면? 나는 규범화된 땅 위에서 설명될 수 없는 존재들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한다. 달리고착각하고, 넘어지고안착하고, 뛰어넘는멀어지는 신체의 동작.
물감을 덮어 움직임을 숨기다가도, 표면을 다시 긁어내 파묻혀있던 형태를 찾는다. 이따금 긁어내던 표면은 부서지고 꿰뚫린다. 어떤 곳에도 머무를 수 없어서 공중을 떠돌게 된 것들을 지면 아래에서 건져올리기 위하여.
땅을 불신해서 점점 공중으로 떠오르는 몸. 바닥에 접지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공중에 뜬 상태. 자꾸 바닥에서 멀어지는 나의 몸에 대해 생각한다.
달리는 과정에서 장애물을 넘는 상황을 떠올려 보겠다. 허들을 넘는 동작. 바닥에서 멀어지기 위한 발돋움. 몸이 부유할 때의 텅 빈 느낌, 나와 지면 사이의 단차. 그 사이를 긁어낸다. 계속 긁다가 표면을 뚫고, 부순다. 다시는 바닥에 닿지 않기 위해서.
화면의 일부를 긁다가 꿰뚫거나 부수면 매끄럽던 표면이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서 끊긴다. 매끄러운 표면은 사실 합의된 약속, 또는 규칙에 의해 유지되는 환영에 가깝다.
가끔 나는 매끄러운 표면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인 척 한다. 땅을 딛고 있는 상태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전히 떠 있는 상태다. 한국 사회는 특정한 조건을 갖추어야지만 사회 속에 접지된 것으로 승인한다. 이성애, 정상성, 시민권을 가진 몸이 그렇다. 승인되지 못한 몸은 안정적인 접지가 불가능하고, 승인된 듯 가장해야만 바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그래서 나의 ‘떠 있음’은 규범의 좌표에 포함되지 못했을 때 생기는 불가피한 상태다.
땅에서 멀어지기 위해 발바닥을 밀어 올렸을 때, 안타깝게도 허들을 넘지 못하고 넘어져버린 상황에 대해 상상한다. 나로 하여금 어떤 것을 넘게 하고, 공중에 뜨게 만들고, 바닥에 몸이 내동댕이쳐지게도 만드는 그런 허들을 생각한다.
4개의 허들 중 앞의 두 개는 성공적으로 넘은 것들이다. 내가 생각하는 ‘넘는 움직임’, ‘넘을 때의 풍경’을 생각하면서 드로잉했다. 뒤의 두 개는 넘다가 실패한 것들이다. 허들 곳곳에 발이 걸린 흔적처럼 이리저리 자상이 나 있다. 몸은 언제나 이중적인 조건에 놓인다. 무언가를 넘는가 하면, 동시에 걸리기도 한다.
허들은 본래 바닥에 붙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넘도록 만드는 사물이다. 나의 허들은 벽에 붙어 있다. 이 허들은 공중에 부유한 나와, 자꾸 중력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바닥을 이어주는 것 같다고 느낀다. 부유와 접지 사이에서 몸이 처하는 조건을 드러내는 장치처럼 보이길 원했고, 그렇기에 <허들>은 세로로 벽에 붙어 있다. 마치 사다리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2G 휴대폰을 달라고 졸라서 하던 게임 ‘놈 Nom’을 떠올린다. 무언가에게 가닿기 위해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장애물을 계속 넘어야 한다. 정사각형의 픽셀에 닿으면 곧바로 달리기가 좌절되고 다시 시작하는 반복적인 구조, 한 단계를 지나면 더 높은 단계가 기다리는 게임의 진행 방식.
이 반복은 사회적 조건과 닮아 있다. 어떤 상황에서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시도 할때, 그 시도는 곧바로 취소되고, 삭제되고, 또 다시 시도된다. 가시화와 삭제, 재시도의 순환은 구조적으로 출구 없는 조건처럼 보인다. 문득 떠오른 게임의 좌절과 재시도에 나의 상태를 겹쳐 본다. 달리는 행위는 어떤 결승선을 향하기보다는 실패와 시도의 회로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린다. 무언가에 가닿기 위해서.
⊛
사회에서 정체성은 보통 주민등록상의 성별처럼 틀 안에서 설명되기를 요구받는다. 이 틀에 부합하는 것들만이 제도적으로 인정된다. 정해진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정체성은, 설명하는 순간 그들의 복잡한 상태가 단순한 이름으로 고정되곤 한다. 그래서 어떤 정체성은 말하기를 유보한다.
정체성은 항상 사회적으로 명명 가능한 범주 안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한국 사회 내 정상성으로 규정된 정체성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법적으로 승인되지 않는 친밀함과 비가시적인 연대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제도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공식적으로는 없는 것처럼 취급된다.
(그래서) 나는 계속 떠돈다. 명확한 이름이나 자리를 갖지 못한 상태로 머무르고, 떠난다.
(그러나) 두렵다. 가시화와 비가시화 사이에서 발언을 유보한다.
(그리고) 들어맞지 않는 관계와 행동을 면으로 덮어 은폐하고, 선으로 강조하고 긁어서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
Cuddle(2025)은 하나가 되고 싶은 껴안음에서 출발했다. 이 포옹은 얼음 같다. 형태가 일렁이는 불보다 견고한, 그래서 뜨겁지 않고 차가운 얼음.
흐르고 있는 액체의 여러 입자가 뒤엉키며 얼어붙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얼음은 하나로서 견고하지만, 실은 흩어지지 않도록 미세한 입자가 서로를 껴안고 있다. 얼음의 뿌연 표면은 내부의 접촉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게 만든다. 냉동실에서 꺼내지는 순간, 그들은 마치 보호막 없이 외부에 노출된 것처럼 취약해진다. 녹을수록 투명해지는 표면, 그곳에 물과 정확히 같지 않은 물이 있다. 물 아닌 물은 내부적으로 물과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가졌고, 상이한 조건에서 작동한다. 그것들은 마치 물처럼 행동하며 자신의 내부를 드러낸다.
차갑게 굳은 표면 아래 서로를 감싼 미세한 접촉을 상상한다. 서리가 표면을 뒤덮은 탓에, 이 접촉이 껴안음이라는 사실은 오래 지나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다. 하나로 설명될 수 없는 것, 감지되기 어려운 친밀함. 그것이 하나가 되고 싶은 껴안음이다.
상반된 태도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 내내 충돌했다. 먼저, 은폐한다. 포옹하는 인영 위에 손으로 물감을 발라 가리고, 스크래퍼로 물감을 펴 바르며 형태를 뭉갠다. 그 다음, 다시 드러낸다. 껴안는 팔의 동작을 따라 선을 긋고, 더 이상 형태가 보이지 않게 된 표면을 긁어내 서로 맞붙은 인영을 위로 끌어낸다. 작업 안에서 나는 불확실한 태도를 취한다. 집단적 정체성을 수용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멈춘다.
서리 뒤덮인 얼음의 표면이 점점 투명해지는 것처럼, 과정 안에는 명확한 형태를 은폐하려는 동작과 은폐를 노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껴안음’을 보이게 하고 싶어 하면서도, 보이는 것을 유보한다. 친밀함의 형태를 정상성 아래 파묻어 꽁꽁 숨기다가도, 표면 위로 발굴하기를 반복한다.
⊛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사람들, 어디에도 드러날 수 없는 것들, 어디에도 앉거나 쉴 수 없는 사람들, 숨겨두어야 하는 것들’
서성이는 사람(2025)은 사회적 기준에서 이탈해 자리를 부여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이성애 규범과 퀴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드러낼 수 없는 것 같은 둘로 나뉘어진 사회 언어의 틈에서 명확한 하나를 붙잡지 않은 상태로 떠돈다. 작업은 나의 실제 신체와 비슷한 사이즈다. 나무로 이루어진 몸은 바닥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한다. 그리고 외부의 힘에 의해 밀리고 당겨진다.
이 작업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작동된다. 고정된 위치를 벗어나고 싶어서 다리가 달렸지만, 그 움직임은 정해진 공간에서만 실현이 가능하다. 모순되게도, 어떤 규범에 속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려는 시도는 규범 내부에서 가시화된다.
그래서 조각인지 회화인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서성이는 사람’은 제 자리를 갖지 않는다. 어디에도 머물 수 없는 사람들, 혹은 한 곳에 발붙이기를 유보하는 태도처럼 공간 속을 배회하고 누군가에 의해 멈춰 선다.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되었음에, 어느 공간에서도 완전히 머물 수 없다. 다리가 달린 조각, 떠돌아다니는 신체는 계속 임시로 공간을 돌아다닌다. 아직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
내 작업은 정체성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함이 아니라, 사회적 범주 바깥에서도 자리를 찾지 못해 불확실한 상태에 관한 것이다. 이성애 규범이 바이블처럼 작동하는 사회 속에서, 선택지를 강제하는 분류 체계와 그 범주에 스스로를 온전히 포함시킬 수 없는 존재들의 생존전략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불확실하고 유보된 위치,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 (머무르기 위해서)(떠나기 위해서) 그리고, 만들고, 움직인다.